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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 / 윤영선 <여행> 리뷰

작가 이스윽 2021. 3. 18. 22:30

오랜만에 초, 중, 고 동창을 만나면 반가움이 가장 먼저 앞선다.

그러다 5분 정도 근황을 신나게 24시간 밤샐 기세로신나게 떠들지만 이내 소리가 사라진다.

그도 나도 모두 뻘줌해지는 3초의 정적 순간이 있다.

이후 어색함을 없애고자 자연스레 과거에 있었던 사건, 에피소드를 언급하며 시간을 예전으로 돌린다.

그러면 멈추었던 입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윤영선의 <여행>은 고향 친구의 장례식을 가기위해 1박 2일 간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서울역, 기차 안, 장례식, 화장터, 버스 안, 터미널로 크게 여섯 꼭지로 구분되어 있다.

 

고인이 된 경주는 삼사관출신 장교에 전역 후 사업을 하다 잘 풀리지 않고 간암을 얻어 죽음을 맞이한다.

모피회사 경영하는 만식, 어떤 회사인지 모르지만 바지 사장으로 추측되는 대철, 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온 태우, 트럭을 몰고있는 전 택시기사 양훈, 신발가게를 운영중인 상수.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유지하다가 오랜만에 만나게 된다.

 

 

기택: 미안하네. 자네 오빠는 가고 죽었다는 내가 이렇게 살아 돌아왔으니. 이거 면목이 없네. 아무도 내 심정은 몰라

내가 평생을 일구어 왔던 가구 공장이... 불길에 훨훨 휩싸였을 때.. 그때 그 심정말이다..

나도 그 안에 뛰어들어가 가구들과 함께 타 죽고 싶었어. 아니 서기택이는 그때 이미 죽었어. 불에 타서. 여기 앉아 있는 나는 허깨비야. 

 

삶과 죽음은 누가 정의하는가? 대철의 돈을 떼먹고 바다에서 실종된 줄만 알았던 기택이 돌아오며 대철과 기택의 주먹다짐으로 경주의 장례식은 난장판이 된다. 살아도 산게 아니라는 기택. 스스로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그는 산 자인가? 죽은 자인가? 목소리만 나오던 그는 문을 넘어온다. 마치 죽은 자의 공간에서 산자의 공간으로 넘어오는 죽은 자로 보인다. 

 

태우: 아저씨, 제 친구 놈이 며칠 전에 죽었거든요. 그런데 어젯밤엔 그 친구 장례식에 죽은 놈이 왔어요.

(바지까지 벗으며) 그러면 말이죠. 죽은 그 친구도 다른 친구가 죽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다시 살아서 올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경주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온다. 태우는 비교적 이성적이고 점잖은 행동을 보이는 캐릭터다. 고인에 대한 예의를 갖추려 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더욱 버스안에서 그가 하는 대사는 매우 흥미롭다. 똑똑하다고 주변인물로부터 인정받은 그가 하는 질문이다. 

 

양훈: 우리 다음 달에 만나서 뭘 하자고 그랬었잖아. 그리고 나 이렇게 못 가.(태우에게) 야, 정말 우리 힘들어. 그냥 먹고 사데 바뻐. 그러다 보면 그냥 세월이 막 가는거야. 이번에도 그러잖아. 어쩌다 보니 경주가 죽었잖아. 우리라고 안 그러겠어? 매일매일 먹고산다고 바쁘다 보면 그냥 시간이 가는거야. 그러니까 우리를 좀 어떻게 해줘야지.

 

장례식이 끝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이들은 현실을 마주한다.  각자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시간.

1박 2일의 짧았던 여행의 끝이 찾아온다. 아프다는 양훈은 둘째고, 일단 각자의 복귀에 정신이 없다. 

조만간 양훈의 장례식장에서 그들은 다시 만날 것 같다.

 


 

친구들끼리 헤어질 때 나오는 말. '너무 좋다. 우리 다음에 언제 봐?' '진짜 조만간 꼭 보자.''바로 연락할게.' 따위의 말. 

결국 다들 자신의 삶과 현실이 있다. 먹고 사는 일에 치여 나의 현재 상황과 상태를 동창은 잘 모른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관심사가 달라지며 이야기의 주제도 다르고 공감이 어려워진다. 공통의 관심사는 학교다닐 때 있었던 재밌던 일들. 친하지만 어색한, 가깝지만 먼 존재들이다.